3,000년 전부터 열반경,등 인도의 옛 불전에서 비파나무는 대단히 띄어난 약효를 가지고 있고, 생명체의 만병을 고치는 식물로 등장한다. 비파나무는 대약왕수(大藥王樹), 비파나무 잎은 모든 근심을 제거하는 무우선(無憂扇)이라 이름 붙여진 것에서도 그 치유력이 이미 그때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비파나무는 6세기경 중국의 '천자문'에도 나온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고려시대 말 명나라 사신으로 남경에 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시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조경趙絅(1586~1669)의 시에 등장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비파가 각 가정에서 재배되고 남쪽 지방 섬마을에 자생하게 된 것은 불과 90여년 전이라고 학계에서는 말한다.
1. 중국 문헌에서의 비파나무
<천자문> ‘벽오동은 일찍 시들고, 비파는 늦도록 푸르네 (梧桐早凋, 枇杷晩翠)
<본초강목 16세기. 명나라 이시진>”그 잎 모양이 비파(琵琶)를 닮아서 이름이 붙었다. 나무 크기는 한 장丈(3미터) 남짓하고 가지가 무성하다. 긴 잎은 크기가 나귀(驢)의 귀 같고 뒷면에는 노란 털이 있으며, 짙은 그늘에 너울거리는 모양이 사랑스럽다. 사철 시들지 않고 한겨울에 흰 꽃이 핀다. 3, 4월이 되면 열매가 맺는데 소복이 모여 달린다. 탄환 크기로 자라는데, 익을 때의 색은 노란 살구 같다. 털이 조금 있고 가죽은 아주 얇다. 핵은 크기가 상수리(芧栗, 橡實의 이명) 같고 황갈색이다. 4월에 잎을 채취하여 햇볕에 말려서 사용한다
<중약대사전>, <중국식물지>, <일본식물도감> 및 <식물의 한자어원사전> 등 중국과 일본 문헌에서도 비파枇杷는 비파나무(Eriobotrya japonica [Thunb.] Lindl.)라고 일관되게 설명한다
2. 우리 문헌에서의 비파나무
고려시대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남경을 다녀올 때 지은 시 ‘양주에서 비파를 먹다 (楊州食枇杷)’에 등장한다. 이 시 결구에 “초나라 강가에서 새 비파를 맛보니, 씨앗을 품어서 동쪽 나라에 심고 싶어라."라고 노래한다.
<동의보감> 탕액편에서 비파엽(枇杷葉)에 ‘당唐’이라는 글자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1600년대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비파는 조선시대에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 글에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가 1421년에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는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왔다고 하더라도 비파는 구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임진왜란 후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 즉 강홍중姜弘重(1577~), 조경趙絅(1586~1669), 홍우재洪禹載(1644~?), 남용익南龍翼(1628~1692), 신유한申維翰(1681~?), 조명채曹命采(1700~1763), 김기수金綺秀(1832~?) 등의 글에 비파가 진귀한 과일로 등장한다.
조경의 시 ‘비파편(枇杷篇)’
嘗讀蜀都賦 내가 일찍이 <촉도부>를 읽었는데
林檎與枇杷 능금과 비파가 있었네
林檎非異果 능금은 기이한 과일이 아니니
桃李無等差 복숭아나 자두와 다를 것이 없으나,
枇杷是何物 비파는 어떤 것인지 몰라서
坐井良可嗟 우물 안 개구리 처지를 자못 탄식했다네.
今來海外國 지금 바다 바깥 나라에 오니
正値枇杷熟 마침 비파가 익을 때라.
島主餉一籠 섬주인이 한 바구니를 보내왔는데
均圓似龍目 고루 둥근 것이 용안 비슷하구나.
冷甘井蓮避 차고 달기는 옥정玉井의 연蓮보다 낫고***
罅發蒲萄僕 (껍질을) 벗겨내니 포도가 숨어있네.
經齒口生津 이빨로 깨물자 입에 침이 고이고
下咽胸自澹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가슴이 산뜻해지네.
開花問何時 꽃은 언제 피느냐고 물어보니
時卦初轉坎 겨울철로 접어들 때라네.
結果問何時 열매는 언제 맺는가 물어보니
朱明按月令 월령을 살피더니 여름철이라네.
一名是盧橘 또 한 이름이 노귤盧橘 이고,
柑柚同味性 맛과 성질이 귤이나 유자와 같은데.
苞貢闕夏書 하서夏書 우공禹貢편에 공물로 실려 있지 않으니
産非九州境 구주九州의 경내에선 생산되지 않았네****
安得薦金盤 어떻게 하면 이 과일을 금쟁반에 담아서
一獻君王聖 우리 임금님께 바칠 수 있을까?
翻思三代時 다시 생각하니 삼대三代 시절에는
而不貴遠物 먼 고장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네
百馬死山谷 수많은 말들이 산골짝에서 죽으니
茘芰爲漢疾 리치(荔枝, Litchi)가 나라의 근심거리였다네.*****
吐哺三歎息 먹다가 뱉으며 세 번 탄식하고서
謝爾枇杷實 너희 비파 열매에게 고마워하노라.
1937년 간행된 <선한약물학>은 비파에 대해 “가정에 재배하나니라”라고 기재하고 있어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이나, 1943년 <조선삼림식물도설>, 1957년 <한국식물도감> 목본부 등에는 비파나무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당시에 비파나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널리 재배되지는 않은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 후, 1956년 이영노, 주상우 공저의 <한국식물도감>에는 “산에 자라기도 하나 보통 집안에 재배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다시 비파나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1966년에 임업시험장에서 발간한 <한국수목도감>과 1971년 농촌진흥청에서 간행한 <약용식물도감>에 비파나무가 나오는데, “일본산으로 남쪽에서 과수 또는 관상용으로 심고 있는 상록소교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앞의 두 문헌은 모두 이창복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한편 1991년에 간행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비파나무가 “원산지는 중국과 일본의 남쪽지방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는 약 60년이 된다”라고 하여 1930년대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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